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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텔레만.. 장례 칸타타..

by rickas 2012. 12. 22.

 

 

그러구 보니 이 블로그질을 시작한지 5년이 다 되어간다.. 딱 5년 전.. 하두 기가 차길래 머 딴 짓거리 할게 엄나 찾다가 생각한 놀이 중의 하나가 블로그질이었는데.. 어느덧 꼬박 5년이 흘렀다.. 근데.. 5년이 흘렀는데.. 여전히 당시의 출발점에 그대로 서 있는 듯한 이 주옥같은 기분은 머냐.. ㅅㅂ 사실 요번 임팩트가 5년 전에 비하면 오히려 훨씬 더 큰 것 같긴 한데.. 지난 세월 동안 지내 오면서 자연히 쌓인 공력이 있기 땜시 별루 걱정은 안 됨.. ㅋ 머 애써서 요령껏 신경을 꺼버리구 살면 되긴 하니깐.. 아마도 실실 상상 이상의 것들을 보여 주실 것 같아 ㄴㅁ 설레기두 하구.. 기대되기두 하구 그런다.. -_-;; 모 내 알 바 아니고 신경 쓸 일도 아니긴 하지만.. 어쨌거나 틀림 없이 앞으로 생겨날 조또 힘 엄는 잉간들을 위한 음악을 하나 올려 본다.. 텔레만의 장례 칸타타..


프로테스탄트 교회 칸타타의 우수함에 대한 일반적인 의견은 대개 바하의 작품들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바하의 칸타타 작품들은 이 특별한 음악 형식의 역사에 있어서 완벽함의 정점으로 인식될 뿐만 아니라 17세기 말부터 18세기에 걸쳐서 프로테스탄트 교회 음악에 의해 도달될 수 있는 궁극의 지점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들이 바하와 동시대의 음악가들에게까지 공유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텔레만 같은 경우는 18세기만 해도 교회 음악의 아버지로 이름이 붙여졌고..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 지위에 오르려는 후보 군들 중에서.. 1722년의 라이프치히의 잉간들에게는 텔레만이 바하를 앞선 첫 빠따였을 정도였다.. 오늘날의 의견과 당시의 의견 간의 불일치는 궁극적으로는 당시 텔레만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기준이 바하의 작품에는 맞지 않았다는.. 그런 사실에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오늘날의 판단은 완존 다르다는 것.. 그게 대개는 바하 연구가들의 악의에 찬 텔레만 죽이기에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도 있고.. 머 과거를 현재에 억지로 미화하려다 보면 꼭 무리수를 두게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조또 황당한 새끼들이 쳐 떠받들어지는..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인식의 패러다임을 자진해서 바꾸는..ㅋ 그런 골때리는 상황이 버젓이 오늘날에도 벌어지고 있으니.. 텔레만 같은 경우도 오바해서 열폭질을 하는 일부 병신 새끼들에 의해 그러지 않았으리라는 법이 없을 듯.. 항시 보면 이런 것들은 유일무이를 외쳐 대고 다양성이라는 것은 인정들을 안 하고 죽이자고 덤벼드니 다른 잉간이 눈에 보였겠냐.. 킁..


델레만의 장례 칸타타는 그가 함부르크에 있던 시절에 쓰여졌는데.. 레치타티보와 아리아.. 그리고 코러스의 세 파트가 어우러진 웅변조의 스타일을 보여준다.. 이러한 형식은 18세기 초 에르드만 노이마이스터에 의한 개혁 이후 지속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형식이었다고 한다.. 이 칸타타는 성서의 다니엘서에서 텍스트를 가져다 시작하고 있는데 레치타티보를 동반한 그 해석은 죽음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보다는 오히려 개인적으로 다양한 관점.. 즉 졸라 개가튼 세상에 대한 이별을 통해 얻어지는 영적인 기쁨 내지는 완전한 평화의 세상으로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에 안길 수 있는 그런 여정의 출발이라는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거 참.. 개똥밭에서 굴러도 그래도 이승이 낫다던데.. 이 양반 인식은 좀 달랐던 듯.. -_-ㅋ 그래서 그런지 곡은 죽음에 대해 이승에 남겨진 잉간들의 관점에서의 슬픔보다는 죽은 이에게 다가올 내세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아멜링 누님이 부르는 단 하나의 소프라노 아리아.. 머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바하와 맞장을 뜰 수 있는 공력을 보여줄 만큼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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