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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뷔누아.. 미사.. 무장한 남자..

by rickas 2024. 3. 3.

같은 사람 목소리라도 개막장의 내용을 노래할 수도 있고.. 아님 졸라 성스러운 내용을 노래할 수도 있는 법.. 그래서리 지난 번에 몇몇 오페라를 들은 담에 귓구녕을 좀 씻어내고자 종교 음악 몇 개를 들었는데.. 귀찮아서 내비 두었다가 오늘에서야 한 개 포스팅 한다.. 원래 이런 음악들을 듣게 된 계기는 내가 무슨 중뿔난 신앙심이 돈독해서라거나 아님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욕구에 불타 올라서가 쥐뿔도 아니라 그저 순전히 오디오 때문이었는데.. -_-ㅋ 예전에 집 근처에 있던 중고 오디오와 판을 취급하던 가게에서 흘러 나오던 중세의 미사곡을 비롯한 고음악들의 소리.. 음악이 아니라 소리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_-;; 암튼 거기에 완전 홀딱 넘어가면서 그렇게 됐는데.. 물론 당시의 오디오가 워낙에 이런 음악들을 잘 울려줄 만한 기기들이었기 때문이었겠지만.. 내 기억에 확실치는 않으나 당시 스피커는 ESL 57, 파워는 클라세의 DR2, 프리는 스펙트럴의 DMC10 이었던 것으로 생각됨.. 소리라고는 했지만 어쨌거나 글케 그 밑도 끝도 없이 걍 훅 치구 들어오는 그런 음악들에 졸라 감동을 때리군 했었다는.. 무슨 졸라 논리가 정연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감정을 마구 드러내 놓는 것도 아니면서 그저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던 그 소리에 넋이 나가서 한참을 듣다 오군 했었는데.. 사실 함정은 집에서는 그런 소리가 안 나왔다는 것.. -_-;; 암튼 오늘은 그 당시 들었을 수도 있는 오래된 미사곡을 한 개 올린다.. 앙투안 뷔누아의 미사곡.. 무장한 남자.. 가 실려 있는 판이다.. 뒷면에는 비슷한 시기의 음악가였던 질 뱅슈아의 모테트가 녹음되어 있고.. 연주는 이런 곡이면 으레 떠오를만한 양반들.. 프로 칸티오네 안티쿠아 런던의 연주 되겠다..


앙투안 뷔누아는 1430년에 태어나서 1492년 세상을 졸한 양반으로 후기 부르고뉴 스타일의 선도적인 작곡가였다고 한다.. 뷔누아는 궁정의 샹송 장르에서 독특한 위상을 갖고 있었는가 하면 오케겜 시대에 일어난 음향 분야의 중요한 혁신에 있어서도 일정 부분을 책임지고 있다 하겠다..  아마도 뷔누아는 카수로서 자신의 개별 보컬 파트의 범위를 확장했으며.. 각 파트가 다른 파트의 간섭 없이 자체 범위에서 작동하는 대위법적인 질감을 개척한 선구자였다.. 뷔누아의 음악은 1400년대 중후반의 경향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실제로 그의 형식적 구성은 다른 작곡가들에 의해 가장 많이 모방되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뷔누아의 음악이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의 동시대의 명성과는 일치하지 않는 결과라 할 수 있겠다.. 뷔누아의 초기 생애와 교육 등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다만 1450년대부터 프랑스 왕실과 연관이 되기 시작했고.. 1467년에 부르고뉴에 있으면서 궁정과 느슨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는 정도가 구체적인 사실이라 하겠다.. 엄밀히 말하면 부르고뉴 궁정은 1419년 선량공 필리프 3세의 통치 시작부터 1477년 용담공 샤를 1세의 사망까지 정치적, 문화적 전성기를 누렸고.. 중세 후기 음악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얘네덜 호칭은 예전부터 볼 때마다 느꼈던 거지만 졸라 유치뽕이다.. ㅋ 선량공, 호담공, 용맹공, 용담공 등등.. 졸라 병신같어.. -_-ㅋ 암튼 뷔누아는 1470년부터 공식적인 지위를 맡았고.. 1483년까지 용담공 샤를 1세의 딸인 마리 1세와 그의 남편 막시밀리안 1세를 계속 섬겼다.. 이후 그가 사망할 때까지 뷔누아의 활동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다.. 뷔누아는 그가 친분을 맺고 있었던 높은 신분의 사람들을 생각해 볼 때 상대적으로 외진 위치의 낮은 직책에 머물렀던 감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직업적 명성은 엄청나서리 졸라 촌구석의 코딱지만한 시골 교회에서도 뷔누아가 도착할 때는 상당한 명성을 가진 카수들이 그 뒤를 따랐을 정도였다고 한다.. 뷔누아는 확립된 권위를 고려하지 않는 어떻게 보면 자의식이 과잉일 정도의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1461년에는 신부를 구타한 혐의로 파문을 당했지만 나중에 사면을 받기도 했다.. 그치만 이런 자의식이 졸라 모지리 애새끼들한테 나타나는 신체적 열등감을 기괴한 퍼포먼스로 때우려 하는 쪽으로 흘러간게 아니라.. 그의 음악에서 나타나는 음향적 질감에 고스란히 투영되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뷔누아는 대위법 발명의 가장 중요한 시금석 중 하나가 된 "무장한 남자" 테마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이는 뷔누아가 작곡한 미사 "무장한 남자" 가 뒤이어 나오게 되는 이 테마를 사용한 곡들 중 아마도 첫 빠따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뷔누아가 이 곡에서 사용한 리듬 체계는 그 시대에 가장 많이 모방된 것 중 하나였으며.. 실제로 그의 리듬 당김음의 구사력은 뷔누아 특유의 스타일에 활력을 불어 넣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음악적 창의성 외에도 뷔누아는 시인으로서도 완전한 명성을 얻었고.. 순수 문학 원고에는 3개의 시가 남아 있단다..


연결시키는 링크는 포스팅하는 판과 동일한 음원인 것 같은데.. 이 미사곡에서 두 번째 곡 글로리아를 올린다.. 카운터 테너 2명, 테너 3명, 베이스 3명.. 이렇게 총 8명으로 구성된 연주자들이 각각의 성부에서 마치 암흑 속에서 촛불이 켜지는 듯하게 두둥실 떠오르는 느낌의 노래를 교차로 들려주다가 함께 들려주다가 그러는데.. 이거야말로 색다른 종류의 음악의 열락이라 할 만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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