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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젤렌카.. 신포니아 콘체르탄티..

by rickas 2024. 7. 14.

새벽에 일어난 김에 골방에서 들을 판을 고르다 간만에 젤렌카를 꺼냈다.. 그의 관현악 작품이 실려 있는 아르히브의 3장 짜리 전집이다.. 꽤나 오래 전에 간혹 들르곤 하던 오프라인 중고 판 가게에서 쥔장이 아니 ㅅㅂ 어케 체코의 바하인 젤렌카를 모르냐고 쫑코를 줬던.. 그래서 그 이후 기분 나빠서 안 들을려다가 한 번 듣고서는 그의 음악에 홀딱 반하게 되었던 이력이 있는 작곡가이다.. -_-ㅋ 하인츠 홀리거, 베리 터크웰, 만프레드 삭스, 크리스티안 자코테 등이 등장하고 카메라타 베른이 연주하는 카프리치오 5곡과 신포니아 콘체르탄티 형태의 3곡이 실려 있는 판이다.. 카프리치오는 일종의 모음곡인데 그 형식과 질서 등에 제약이 없기 때문에 자유로운 음악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카프리치오에서는 때때로 젤렌카의 고향 체코의 민속 무용을 연상시키는 모티프의 리듬과 멜로디가 등장하고 있다.. 특히 이 전집에서 인상적인 곡은 8성을 위한 신포니아 콘체르탄티 A단조인데.. 젤렌카 특유의 어둠의 다크니스와 천변만화하는 폭발적인 변덕스러움이 잘 나타나는 졸라 머찐 곡이라 하겠다.. 바로크 초기 과연 어떤 음악가가 이 정도의 짙은 고동색이 수천 수만 가지 농도로 다양하게 흩뿌려지는 곡을 만들 수 있었겠는가를 상상해 보면 젤렌카에 대한 나으 애정이 특별할 수 밖에 없다..

젤렌카는 그의 생애 동안 바하만큼이나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그의 생애는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와 모호한 공백으로 가득 차 있다 하겠다.. 그는 평생 명성을 누렸지만 이러한 명성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지는 못했다.. 그의 죽음 이후 처음의 30년 동안은 그의 교회 음악 작품 중 일부가 여기저기서 연주되었지만 그 이후 수십년을 거쳐 18세기에는 거의 완전히 잊혀진 작곡가가 되고 말았다.. 젤렌카는 소수의 음악 전문가만이 기억하고 존경하는 존재가 되었지만 바하 음악의 르네상스가 끝난 지 100여년이 지난 오늘날 그의 이름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되는데.. 이렇게 된 데에는 그의 오보에 소나타에 주목한 최초의 음악가였던 하인츠 홀리거의 영향이 지대하다 하겠다.. 사실 젤렌카의 초기 시절 그니깐 교육 경력이라든가 음악 관련 밥벌이라든가 하는 정보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한다.. 그의 경력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의 정보는 30세였던 1709년에 오스트리아의 외교관이었던 루트비히 요제프 폰 하티그 백작 밑에서 연주자로 일했다는 정도인데.. 그는 더블 베이스를 연주했다고 하고 당시 음악가들의 일반적인 루트였던 오르간 연주자로 일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당시의 거의 모든 작곡가와 현저하게 달랐다.. 또한 이 양반의 생애에 여자가 등장하는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데.. 모쏠인지는 모르겠으나 암튼 미혼이고 자녀도 없이 독신으로 일생을 살다 죽었는데 이 역시 당시 작곡가들에 비추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엄격한 카톨릭 신자였던 젤렌카는 1710년에 하티그 백작의 추천으로 작센 선제후이자 폴란드 국왕의 궁정 오케스트라에 더블 베이스 연주자로 합류하기 위해 드렌스덴으로 갔는데.. 그곳에는 아우구스투스 1세가 그의 여주인들로 둘러싸여서리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궁정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러한 생활을 위해 끊임없이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주변로부터 엄청나게 돈을 긁어 모았다고 한다.. 또한 그의 아들인 아우구스투스 왕세자는 1716년과 17년에 베니스를 방문하는 동안 여러 명의 음악가들을 고용했는데 이중에는 로티와 하이니헨도 있었다.. 이 위정자들은 이렇게 고용한 음악가들에게 엄청난 관대함을 베풀어서리 연간 30,000 탈러에 달하는 연봉을 지급했다는데.. 젤렌카의 경우 나중에 조금씩 인상되었다고는 하나 드레스덴에 합류 초기 연봉은 꼴랑 300 탈러에 불과했단다.. 그치만 젤렌카는 드레스덴에서 착실하게 경력을 쌓았고 또한 비엔나와 베니스를 방문하여 푹스와 로티 밑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다.. 카펠마이스터 자리는 하이니헨의 차지였고 그가 1729년 7월에 사망하자 젤렌카가 그 자리에 임명될 줄 알았지만 엉뚱하게도 1731년 그 자리는 당시 드레스덴에서 오페라 공연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그보다 스무 살 아래인 아돌프 하세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젤렌카는 이에 졸라 킹받아서리 1733년 11월 28일 왕에게 자신의 신세 한탄과 본인이 그 역할을 맡아야 하는 당위성을 간곡하게 호소하는 청원서를 넣었지만 이는 거절되었다.. 이는 아마도 당시 하세를 선호하는 드레스덴 궁정의 "오페라 마피아" 의 영향과 그가 교회 작곡가로 활동했던 결과였을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젤렌카는 그야말로 당시의 호화찬란한 스탈의 유행과는 거리가 먼 보헤미아 출신의 촌뜨기였지만 성실한 음악가 정도로만 취급을 받았던 셈이었고.. 음악과는 별개로 그의 지위를 갖고는 살아 생전 지속적으로 굴욕을 겪었다.. 1731년부터 1733년까지 졸라 하찮은 인물이었던 루이즈 앙드레라는 잉간이 하세 휘하의 2대 악장으로 고용되었는가 하면 젤렌카가 교회 음악을 담당하는 사이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축제 행사의 음악은 하세가 맡았다.. 심지어 1735년에는 졸라 듣보잡 중의 듣보잡인 토비아스 버즈라는 양반이 젤렌카와 동시에 교회 작곡가로 지명되었는데.. 이 양반은 음악사에 등장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단다.. 이는 그만큼 교회 작곡가를 당시 궁정에서 졸라 허접하게 취급했다는 의미라고 한다.. 젤렌카는 1745년 12월 23일 밤에 사망했고 드레스덴은 프로이센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는 죽기 오래 전에 이미 변덕스럽고 방탕한 궁정의 세계에서 물러났으며 하세를 중심으로 하는 오페라 활동과도 완전히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 이 양반의 외모가 특이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닌데 당시 모든 음악가들이 초상화를 그린 시대에 젤렌카는 기록되지 않은 모습으로 평생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적어도 그의 초상화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한가지 예외를 제외하면 친밀한 개인적 우정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다.. 거의 은둔자적이고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우울해졌던 것으로 보이는 이 양반의 작품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이탈리아 칸타빌레를 비롯한 다른 여러 나라의 특성을 결합한 전통적인 다성 음악에 대한 그의 완전하게 숙달된 솜씨가 아니라.. 주제의 패턴을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깨뜨리는 강력한 주관성 때문이라고 한다.. 젤렌카의 음악은 갑자기 이 마디, 저 시퀀스 또는 특이한 모티프가 예상과는 달리 갑자기 전환되면서 예상을 벗어나는 아름다움이 있고 또한 날카로운 불협화음이 만들어내는 묘한 이질감도 포함해서 무지개 빛깔의 특성을 만들어내는 특징이 있다.. 젤렌카가 1710년부터 연주 활동을 했던 오케스트라는 최고 수준의 악기 연주자들이 합류했고 젤렌카는 이로써 그 시대의 기술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젤렌카의 파트너 중 하나는 바이올리니스트 피센델이었는데 이 양반은 후에 텔레만의 표현에 의하면 젤렌카의 절친이 된 사람이었다.. 젤렌카가 세상을 졸한 후 피센델은 텔레만의 도움으로 젤렌카의 Responsoria를 출판할 수 있는 출판사를 찾는 작업을 은밀하게 진행했지만 실패했고.. 드레스덴에서 젤렌카의 작품이 지속적으로 보호되면서 궁정에 보존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연결시키는 링크는 8성을 위한 신포니아 콘체르탄티 A단조인데.. 젤렌카의 자필 악보가 보여지는데 음반 해설집에서 얘기한대로 음표들이 오른쪽으로 자빠져 있는 꼬라지가 무척이나 공격적으로 보이고 표현을 그대로 옮겨보자면 창조적인 분노가 느껴진다고 하더라..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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