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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1번..

by rickas 2013. 3. 24.

 

 

일반적으로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상황을 진정으로 이해하기에는 그 상황 안의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렵다.. 그래서리 예전에도 보면 주변에서 개폼만 잡다 결국은  지가 속한 사회의 테두리 안으로 돌아가고 마는 위선덩어리 새끼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는데.. 체제의 변혁이 일어난 경우에도 본인이 실제적으로 비극을 겪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개폼을 잡아대는 잉간들이 있기 마련이었던 듯.. 머 이걸 똑같이 위선이라고 매도하기에는 그렇지만.. 적어도 그러한 상황 안에서 비극을 직접 겪으면서 고뇌했던 잉간들에 비하면 그저 예술적인 감수성이 출중하신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머 그렇다..


라흐마니노프는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많은 시인들이나 음악가들과 마찬가지로 인생을 졸라 비극적인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편지에 보면 그가 끊임없이 그의 불행과 비애에 관해 찌질거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치만 여기서 함정은 그의 인생이 특이하게도 심각한 고통이 있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졸라 행복하기까지 했다는 것.. -ㅁ- 그는 사촌과 결혼해서 가족들과 함께 만족할 만한 삶을 살았고 비르투오조 피아니스트로서의 명성 덕에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부를 누렸다고 한다.. 그는 러시아의 혁명적 대격변이라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러시아를 떠났고.. 독일과 프랑스에서의 짧은 체류 기간을 거쳐 결국 미국에 안착을 할 수 있었다.. 그는 1943년 로스 앤젤레스에서 일흔 번째 생일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는데.. 얄궂게도 소비에트의 음악가 그룹에서 그의 음악에 대한 찬사를 담은 메시지를 그의 생일에 맞춰 보내 왔고.. 이는 너무 늦은 메시지가 되고 말았다.. 만약 그가 생전에 이런 메시지를 받았다면 꽤나 기뻐했을테지만.. 아쉽게도 그는 이런 상황의 변화를 알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만 셈이었다..


라흐마니노프가 그의 첫 번째 교향곡을 작곡한 때는 그가 스무 살 때였다.. 이 교향곡 전에도 동일한 조성의 교향곡이 하나 더 있기는 했는데 이는 완성을 보지 못했고.. 작곡자 자신이 이를 졸라 덜 익은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폐기를 하고 말았다.. 이 교향곡의 헌정은 A. L. 이란 이니셜을 가진 안나 로디첸스카야라는 여인에게 이루어졌는데.. 그녀는 라흐마니노프 친구의 마누라였고.. 라흐마니노프가 플라토닉한 사랑을 느꼈던 대상이었다.. 그녀의 혈통에는 집시의 피가 흘렀다고 하는데 이 교향곡에서 나타나는 집시적인 요소를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고 하겠다.. 이 교향곡 악보에는 성경 구절이 적혀 있었는데.. "복수는 나의 것이니.. 내가 이를 갚으리라.." 라는 구절이고.. 이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서두에 적힌 것과 동일한 구절이 되겠다.. 그럼 이건 먼 얘기냐.. 이는 라흐마니노프가 톨스토이의 히로인이 가졌던 죄의식을 안나를 향한 자신의 감정에 그대로 투영시킨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란다.. 그치만 머 실제로 무신 썸씽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다만 라흐마니노프의 종교적인 성향이 투영된 것으로 실제로 이 교향곡에는 러시아 정교회 성가의 잔영이 스며들어 있다고 한다..


이 곡의 초연에 대해서는 상당한 얘깃거리가 있었던 듯한데.. 라흐마니노프의 스물 네번째 생일 며칠 전이었던 1897년 3월 27일의 초연을 맡은 이는 글라주노프였다.. 이 양반은 몸땡이로나 음악적으로나 한가닥 하시는 분이었는데.. 졸라 무자비한 스타일이기도 했고.. 그래서 이 첫 번째 공연에서 오케스트라를 마치 초딩 다루듯이 하면서 개판을 쳐놨다고 한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부주의한 공연으로 인해 졸라 크게 상심을 했고 자신의 교향곡 역시 혐오하게 되고 말았다.. 언론 역시 호의적이지 못했는데.. 어떤 경우는 거들먹거리면서.. 그리고 어떤 경우는 졸라 악의적으로까지 평을 써갈겨댔고.. 이는 라흐마니노프의 고통만 더할 뿐이었다.. 작곡가이자 비평가였던 세자르 큐이는 그 정점을 찍었는데.. 내가 읽어 봐도 이 색힌 좀 심했다.. 따지구 보면 꼴에 지두 작곡가였는데 지하구 라흐마니노프를 비교하면.. 참 별 꼴 같지두 않는게.. "지옥에 있는 음악원에서 재능있는 한 학생에게 이집트의 7개의 재앙을 주제로 교향곡을 작곡하는 숙제가 주어지고.. 그가 라흐마니노프와 같은 작품을 써낸다면 아마도 그는 훌륭하게 실력 발휘를 했다고 지옥에 있던 것들한테 졸라 렬렬한 칭송을 받을 거임.." 머 이런 졸라 유치한 평이었고.. 더불어서 "병적인 화성의 뒤틀림과 어두침침한 분위기에의 집착.." 이라는 평도 써갈겼다.. 이 색히는 졸라 나쁜 색히인 것이.. 라흐마니노프를 지 사적인 편지에서도 뒷다마를 까댔는데.. "30세기에서도 이해가 되지 못할 불합리한 불협 화음으로 가득 차 있는 작품" 이라는 얘기까지 했었다.. 아니 무신 철천지 원수진 일이 있다고 젊은 작곡가의 초짜 교향곡을 이 질알로 난도질을 해 댔는지.. 그치만 결국 그 교향곡이 살아 남아서 오늘날에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 그런걸 생각하면 참 이 새끼도 선견지명 없는 새끼인 듯.. 어쨌건 라흐마니노프는 이 저주 받은 교향곡을 출판하는 것을 포기했고.. 필사본을 폐기해버리기까지 했다.. 그러던 것이 50여년이 흐른 후 레닌그라드 음악원 서고에서 오케스트라 파트가 발견되었고.. 소비에트의 음악사학자들이 주의깊게 악보를 재구성한 다음.. 1945년 가을 모스크바에서 연주가 되었는데.. 소비에트의 평론가들은 이 교향곡이야말로 러시아 음악의 중요한 랜드마크라고 칭송을 했다고 한다.. 비록 라흐마니노프는 세상을 떠났지만 이러한 칭송을 들었다면 그의 젊은 시절의 작품이 이렇게 부활을 한 것에 대해 무척이나 감사했을 것이다..


작품에 얽힌 얘기가 좀 길다 보니 얘기가 늘어졌는데.. 하여간에 무식한 평론가 새끼들은 문제다.. 이것들은 별 볼일 없는 개차반 작품을 명작으로 둔갑시키기도 하고.. 졸라 후대에는 인정을 받을 만한 작품을 당대의 기준에 의해 난도질을 하기도 한다.. 어쩌겠냐.. 역사에 맡겨야지.. 슈발.. 어디서 많이 듣던 개소리인 것 같은데.. 암튼 이런 경우는 별 수 없는 듯.. 곡은 사실 30세기를 운운할 정도로 생뚱맞은 그런 곡은 절대 아니고.. 솔직히 그 정도 난이도면 나 같은 무식한 잉간이 이걸 온전히 들을 수 있겠냐.. -_-;; 다만.. 첨부터 지속적으로 졸라 우울 모드가 압도적이다가 4악장에 가서 갑자기 힘차게 반전을 하는데.. 차슨상 만큼의 세련미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치만 한 뛰어난 작곡가의 젊은 시절.. 첫 번째 교향곡이라는데 의미를 가지고 듣는다면 얼마든지 들어줄만 하다.. 무엇보담도 하이라이트는 2악장의 침잠하는 꿀꿀한 분위기.. 그의 전형적인 스탈을 다소나마 엿볼 수 있는 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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