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보르작.. 교향적 변주곡..
드보르작은 그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뭔가 고집불통의 엄격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젊었던 시절에는 수줍음도 많았고 상당히 조심스러웠던 성격이었던 것 같다.. 물론 나이 먹어서 잘 나가게 된 다음에도 이 양반은 개념없는 편협함과는 거리가 먼 상당히 개방적인 사람이었다.. 미쿡 뉴욕에 새로 설립된 내셔널 음악원 원장에 취임하면서 당시로서는 경천동지할 만한 모든 인종의 음악 전공자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것을 밀어 붙였던 것만 보더라도 그 자신이 음악적 중심지에서 벗어난 졸라 변방 출신의 이방인아어서 그랬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그런 오픈된 인간이었다.. 그가 이 판에 실린 교향적 변주곡을 1887년 런던 콘서트 시즌에서 프로그램에 넣고 싶어서 당시 지휘자였던 한스 리히터에게 졸라 머뭇거리는 태도로 조심스레 제안을 했다고 한다.. 당시에 이 곡은 출판도 안 된 상태였고 그래서 드보르작 자신도 상당히 소심한 접근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런거 보면 아무래도 사진하고는 잘 안 어울리는 듯.. ㅋ 당시 한스 리히터의 답변이 "아니 이 양반아.. 일케 장대하고 아름다운 곡을 왜 여태 꿍쳐 놓구 있었던 거임?? 이 변주곡은 님하의 최고 걸작품 중에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해야 할 만한 작품임.." 이라는 것이었고.. 이 작품의 진가를 알아 본 리히터에 의해 다른 드보르작의 유명한 작품들과 더불어 연주회 프로그램에 성공적으로 오르게 된다.. 물론 이 변주곡은 1877년 6월에서 9월 사이에 작곡된 다음 그 해 12월 프라하에서 열린 교회 건설 기금 마련 자선 콘서트에서 초연되었지만.. 당시 청중들은 이 작품에 호의적이었지만 언론이나 출판업자들은 이 작품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드보르작은 크게 낙담하게 되었고.. 그래서리 이 곡은 거의 십여년을 방치되다시피 했다가 리히터에 의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니깐 드보르작의 이 교향적 변주곡은 쓰여지고 나서 성공적으로 연주되기까지 햇수로 약 십여년의 세월이 걸렸던 셈이다.. 그때만해도 드보르작은 동네에서나 한 가닥하는 전 유럽에서 유명해지기 전 변방의 작곡가였기 때문에 출판업자들이 선호하던 그의 다른 작품들에 밀려나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런던에서의 성공적인 공연 이후 리히터는 1887년 12월 비엔나에서 자신이 지휘하여 비엔나 청중들에게 처음으로 이 곡을 소개하게 되는데.. 그 자리에는 브람스가 드보르작과 함께 앉어 있었다고 한다..
곡은 간단명료한 테마와 이를 이용한 27개의 변주로 이루어져 있는데 뭔가 앞뒤가 사맞지 아니하는 듯한 뒤숭숭하게 파편화 되어있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치만 판 껍닥의 해설에 의하면 드보르작의 풍부한 창작력에 의해 매우 논리적으로 음악적 사고를 발전시켜 나간 작품이라는 얘기라고 하니.. 무식한 나로서는 머 그렇다고 치자.. -_-ㅋ 이 곡의 C장조 주제는 1877년 1월에 작곡된 그의 무반주 남성 합창곡 중 한 곡에서 따왔다고 한다.. 19번 변주까지는 장조로 연주되다 20번부터 24번에서는 단조로 바뀌었다가 다시 25번부터는 장조로 돌아오는데 압권은 처음의 주제가 사용되면서 푸가의 형태로 장려하게 펼쳐지는 피날레라 하겠다.. 그야말로 거장적인 대위법으로 주제를 연주하는 금관의 클라이맥스와 이어서 이어지는 주제를 보헤미아의 폴카 풍으로 매력적으로 변주해 나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세련미와 촌티가 절묘하게 버무려지는 드보르작의 독보적인 솜씨라 하겠다.. 오늘 들은 판은 이스트반 케르테스의 런던 심포니 연주인데 녹음의 전체적인 밸런스도 좋은 것 같고 나름 안정적인 해상도를 보여주는 것 같기는 하지만.. 연주는 걍 범생이스런 연주처럼 느껴진다.. 오히려 아래 링크로 걸어 놓는 고색창연한 토스카니니와 NBC 심포니의 연주가 훨씬 더 듣는 사람을 흥분시키는 매력이 있는 연주라고 생각된다.. 머 물론.. 흑백 필름에서 느껴지는 아련한 향수 때문에 더 머찌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