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골레지.. 미사 로마나..
예전에 아마도 고딩 끝무렵이 아니었나 싶은데.. 아마데우스를 졸라 쇼킹하게 본 일이 있었다.. 물론 그 영화의 스토리가 쇼킹했다는 것은 아니고.. 당시 나는 나름 음악동아를 열심히 읽으면서 되두 않는 잡지식이 좀 들어가 있던 상태였던지라 이 영화의 이야기가 졸라 개구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 정도는 대충 눈치를 긁고 있었는데.. 내가 쇼킹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어떻게 저렇게 극적으로 그야말로 극적으로.. 이 말 이외에는 별달리 표현할 말이 읍다는 것이 아쉽다.. 음악을 적확하게 쓸 수 있는 것인지.. 감탄과 경탄을 넘어서 조낸 쇼킹으로 머리 속에 박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영화에서 살리에리가 음악을 하는 것을 졸라 말리고 타박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골로 가면서 살리에리는 아부지 장례식장에서 이게 다 주님의 은혜라고 감사 기도를 올리는 장면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호로 새끼가 있나.. -_-;; 라구 욕을 읊조리던 찰나에 흘러 나오던 음악.. 바로 페르골레지의 스타바트 마테르였다.. 생전 처음 듣는 음악이었고.. 당연히 생전 처음 보는 작곡가였는데.. 워낙 인상에 깊이 남았던 음악이라 나중에 이 곡이 실린 판을 구하려고 했는데.. 마침 당시에 내가 좋아했던 평론가였던 이 순열 슨상님께서 카라치올로의 판이야말로 이 곡에 관한 한 지고지순의 연주라는 구라뻥을 거하게 치셔서리 그 판을 구하려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요즘은 누구 연주가 최고니 어쩌니 하는 같잖은 얘기를 들으면 조낸 하품으로 응답을 하구 만다능.. -_-;; 암튼 오늘은 그 작곡가 페르골레지의 다른 귀한 미사곡.. 미사 로마나가 실린 판을 올린다..
페르골레지는 모짜르트나 슈베르트와 마찬가지로 음악사적으로 보았을 때 졸라 일찍 세상을 졸했던 작곡가 축에 속한다고 하겠다.. 근데 요절한 이들 중에서도 별시리 일찍 세상을 떴으니 그 때 그의 나이 스물 여섯이었다.. 그는 이태리 중부 안코나 근처의 예시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치만 짤즈부르크 출신의 대단하셨던 거장과는 달리 그는 어린 시절 신동 축에 명함을 내밀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그의 작품 중에 작곡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작품 중 가장 이른 작품이 그의 나이 열 아홉살 때의 작품이었으니 모짜르트 스타일 하고는 완전 다른 양반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머 그렇다구 스물 여섯에 세상을 떠났으니 대기만성이라는 말을 하기도 어째 좀 그렇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몇몇 곡들은 그가 단순히 바로크에서 고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그렇고 그런 그래서 잊혀지고 만 그런 작곡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빛나는 작품들이다.. 페르골레지가 열 아홉살 시절 작곡했디는 솔로 모테트는 아직은 어설픈 솜씨였고 그 이후 6년에 걸쳐 그가 도달했던 거장성의 단초가 드러나 있다고 보기에는 무리라고 한다.. 그치만 그로부터 6년 후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페르골레지는 의심할 바 없는 걸작인 스타바트 마테르를 완성하게 된다.. 오죽하면 독일의 징슈필 작곡가였던 요한 아담 힐러라는 양반은 페르골레지의 백조의 노래였던 스타바트 마테르를 가리켜 "이 곡을 듣고도 아무런 감동을 못 느낌 그건 사람 새끼도 아님" 이라는 과격한 개소리를 지껄였겠는가.. -_-ㅋ 그가 창작 활동을 했던 6년 간의 세월 동안 페르골레지는 다수의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당시의 관습대로 이 오페라의 중간에 끼워 넣는 유쾌한 막간극의 하나였던 "마님이 된 하녀" 가 빅히트를 치면서 그의 이름이 전 유럽으로 퍼지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인기는 파리에서 촉발되었고 그가 죽은 이후에도 10년 간은 인기의 정점에 있었다고 한다.. 오페라 이외에도 오라토리오, 칸타타, 소나타 그리고 미사곡들도 작곡되었는데 페르골레지의 명성이 워낙 높아지다 보니 수 많은 짝퉁 작품들이 그의 이름을 달고 만들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하여간 이 시기를 거치면서 나폴리 스탈의 달콤한 그리고 노래하는 듯한 형식은 페르골레지 음악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고 한다..
페르골레지의 작곡가로서의 애교 있고, 드라마틱하면서 풍자적인 아리아로 이루어져 있는 작품들만 본다면 그의 한쪽 면만을 보는 것이 된다.. 그가 대위법 뿐만 아니라 대규모 음악 형식에 대한 정확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으로 보건데.. 아마도 그는 다성음악의 테크닉을 꽉 잡고 있었던 당시 종교 음악의 대가 프란체스코 두란테의 제자가 아니었을까 추정이 된다는 얘기도 있는데.. 본 F장조 미사곡의 키리에와 글로리아에서 그런 측면에서의 완벽함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페르골레지는 1732년부터 나폴리에서 스티글리아노 군주의 합창단 지휘자 역할을 수행했는데 부르봉 왕가의 나폴리 침공이 있자 그의 고용주를 포함해서 귀족들이 로마로 튀었다고 한다.. 그래서 1734년 5월 16일 페르골레지의 고용주의 친척이었던 카라파 마달로니의 대편성 종교 음악 연주 요청으로 페르골레지는 F장조 미사곡을 로마에 있는 루치나의 산 로렌조에서 연주하게 되었고.. 아마도 그래서 이 곡이 미사 로마나라고 불리우게 된 것 같다.. 정식 명칭은 "6인의 솔로, 2개의 5성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미사 로마나" 되겠다.. 곡은 다성음악의 예술적 아름다움과 이태리와 독일 스탈이 공존하는 매우 복잡한 구조를 보인다고 한다.. 머 그런 해골 복잡한 형식적 분석은 조또 무식한 내가 잘 모르겠고 다만 이 판의 해설에 있는 썰 중에 제일 맘에 드는 얘기가 있어서 옮겨 본다.. "베르니니의 고통스런 황홀경의 조각상이 음악으로 화한 작품".. 졸라 그럴 듯하다.. 고통스런 황홀경의 조각상이라면 산타마리아 델라 비토리아에 있는 베르니니의 테레사 성녀의 황홀을 얘기하는 것일텐데.. 조낸 멋진 비유가 아닐 수 읍다.. 특히 라다무스 테에서 등장하는 소프라노가 부르는 노래는.. 이 판에서는 보이 소프라노가 노래한다.. 종교적 황홀경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이 판은 페르골레지의 미사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새롭게 생명을 얻게 된 순간을 포착한 역사적인 판이라 할 수 있겠다.. 기악 연주는 콜레기움 아우레움이 맡았고.. 소년 합창단은 카탈루니아의 몬세라트 베네딕트 수도원 소속의 아해들이 동원되었다.. 연주는 1972년 2월 26일 나보나 광장에 있는 산타네제 인 아고네에서 행해졌는데 독일 대사와 스페인 대사 등을 비롯해서 이 성당의 많은 후원자들이 함께 참석했다고 한다.. 판 껍닥의 사진은 이 날 연주가 행해졌던 산타네제 인 아고네의 큐폴라이다..
연결시키는 링크는 리날도 알레산드리니가 지휘를 맡고 아마도 콘체르토 이탈리아노가 연주한 영상으로 보인다.. 데이터에 오케스트라에 대한 표기가 없어서리 걍 때린 것인데.. 머 그것밖에 더 있겠냐.. -_-ㅋ 사실 유튭에 동영상이 과연 있을 것인가 하구 긴가민가 찾아 봤는데.. 다행히 이 양반의 명쾌하고 감각적인 지휘로 연주된 영상이 있어서 맘 놓구 걸어 놓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올린 판에 있는 구닥다리 연주보다 알레산드리니의 연주가 훨 매력적이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