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렌카.. 오보에 소나타 2번..
젤렌카라는 이름은 바로크 시대에도 역사가들을 제외하면 별로 알려져 있지도 않았고 기껏해야 극소수의 보헤미아 음악 전문가들이나 알고 있었던 이름이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그의 초상화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은 실정이라니 말 다했다.. 비록 그의 탄생 300주년이었던 1979년 10월 16일을 기해서 그에 관한 정보나 그의 기악곡들 일부에 대한 관심이 좀 생겨나기는 했지만서도 여전히 그는 잘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고.. 바하와의 정서적 유사성으로 인해 시대착오적인 인간으로 여겨지기까지 했단다..
젤렌카는 프라하 남동쪽에 있는 루노비체에서 태어났고.. 밀란 포스톨카스라는 사람의 연구에 의하면 그의 첫번째 음악 선생은 그의 아버지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프라하에 있는 예수 칼리지에 들어 갔는데 여기서 그는 칸타타를 포함한 그의 초기 종교 작품들을 쓰기 시작했다.. 1710년부터는 드레스덴에서 기회를 얻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궁정 오케스트라의 더블 베이스 주자로 활약하게 되었고.. 1715년부터는 비엔나에서 요한 요셉 푹스와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는다.. 그의 선생은 작센의 선거후를 설득하여 그로 하여금 추가적인 공부를 지속할 수 있도록 했고.. 1716년에는 베니스로 가서 공부를 하면서 안토니오 로티를 만난다.. 그가 나중에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나 프란시스코 페오에게 가르침을 받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공부를 마친 후 젤렌카는 비엔나를 경유하여 드레스덴으로 돌아온다.. 엄격한 스타일을 전공한 그에게 있어서 당시의 드레스덴은 요한 아돌프 하세 류의 나폴리풍 딴따라 오페라가 판을 치고 있는 곳이었고.. 그는 그런 환경과 쌈박질을 해야만 했다.. 그의 위치와 비교해 보았을 때 교회의 부악장 자리는 단지 2차적인 관심사에 불과했다.. 실제로 그는 명망있는 위원회로부터 1723년 프라하에서의 대관식을 위한 오페라 작곡을 위촉받기도 했는데 불행히도 그의 음악은 널리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고 한다.. 1729년 젤렌카는 교회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1735년에는 궁정 교회 작곡가가 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그가 남긴 방대한 양의 종교 음악과 관련이 있다 하겠다.. 비록 젤렌카의 경력은 나폴리 스탈 오페라 작곡가로서 일약 유명해진 하세로 인해 고통을 받았지만 그의 작품에 나폴리 스타일을 도입하는 등 새로운 예술적 트렌드를 쉽게 받아들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피센델에 의해 드레스덴에서 힘을 얻은 비발디 숭배라든가 그의 동료였던 하이니헨의 작품에 의해 대표되는 갈란트 스타일의 영향들과 그럭저럭 타협을 하였지만.. 그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동시대의 작품들과는 다른 전통에 의해 쓰여진 것들이라고 하겠다..
올린 판은 그의 6곡의 두대의 오보에와 바순을 위한 소나타 중 2번 곡이 실려있는 판이다.. 예전에 4번과 5번이 실려있던 악상의 판을 올렸던 것 같은데 여기는 2번하구 그의 7성의 콘체르탄티 2곡이 담겨 있다.. 사실 2곡의 콘체르탄티는 좀 멋대가리 없이 맹숭맹숭한 느낌이다.. 이 판의 백미는 머니머니 해두 오보에 소나타.. 쇼엔바움이라는 인간에 의하면 젤렌카는 이 6곡의 소나타에서 느림과 빠름의 4악장이 교대하면서 반복되는 교회 소나타의 대위법적 한계를 탐구해 보려고 했단다.. 마이너 곡이라서 그런지 오보에 소리가 상당히 구슬픈 분위기를 풍기는데 4번 소나타와 정서 상의 느낌은 비슷하다.. 예전에 어디선가 이 곡을 다운받아서 MP3 플레이어에다 넣고서는 개천변을 뛸 때 쌀쌀한 날씨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곡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들어봐도 그런거 같다.. 그나저나 요번 주말부터는 다시 운동을 시작해야겠다.. 너무 퍼져 있었던 느낌이라 이대로 가다가는 몸이 갑자기 폭삭 늙어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 아직은 밤에 쌀쌀한 것 같던데 이 곡을 다시 들으면서 뛰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